[석태문 박사의 VINA프리즘] (6) 호치민의 나라(상)…베트남의 국부 '호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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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태문 박사의 VINA프리즘] (6) 호치민의 나라(상)…베트남의 국부 '호 아저씨'
  • 석태문 대구경북연구원 선임연구위원(농업경제학박사)
  • 승인 2019.07.15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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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지폐. 12종의 베트남 지폐의 인물은 모두 호치민이다. '호 아저씨'로 불리기를 원했던 서민적 지도자 호치민은 베트남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사진=석태문)
베트남지폐. 12종의 베트남 지폐의 인물은 모두 호치민이다. '호 아저씨'로 불리기를 원했던 서민적 지도자 호치민은 베트남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사진=석태문)

[인사이드비나=석태문 대구경북연구원 선임연구위원(농업경제학박사)] 우리나라 지폐는 4종이다. 1,000원권은 퇴계 이황, 5,000원권은 율곡 이이, 1만원권은 세종대왕, 지폐수명 10년을 갓 지난 최고액면 은행권인 5만원권의 인물은 신사임당이다.

사임당은 국내 지폐에 등장한 최초의 여성이자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다. 아들과 어머니가 함께 지폐의 등장인물이란 점에서 우리나라 지폐사에서 율곡 가문은 지폐 명문가라 할 것이다.

한 나라 지폐의 등장인물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등 다방면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했던 당대의 거물이다.

베트남의 지폐는 어떨까? 현재 베트남에서 사용가능한 지폐는 총 12종이다. 100동에서 50만동까지 다양하다. 시중에서 거래되는 지폐는 500동에서 50만동까지 10종이다.

100동, 200동은 사진으로만 봤지 시중에서는 보지 못했다. 베트남 돈(동)의 가치는 우리 돈의 약 20분의 1이다.

100동은 5원, 200동은 10원이니 현 물가수준에서는 거래하기 힘든 화폐 단위이다. 작은 마트나 가게는 500동 지폐도 받지 않거나 거스름으로 사탕 하나를 주기도 한다. 이 추세라면 500동 지폐도 조만간 시장에서 자취를 감출지 모른다.

◆ ‘호 아저씨’로 불리기 원했던 서민적 지도자…화폐 12종에 모두 등장

베트남의 12종 지폐 인물은 모두 호치민이다. 한 인물로 12종을 채웠다는 것이 한국인의 심성으론 믿기지 않는다. 내 세울 인물이 없어서 그랬나, 베트남 조폐공사가 인물 선정 작업을 귀찮아했던 것인가.

한국에서는 한 가문의 인물이 두 번 등장하는 것에도 만만찮은 거부감을 드러냈지 않았던가. 그런 필자에게 12종 지폐의 주인공으로 호치민을 선택한 베트남의 지폐정책은 의문이자, 흥미꺼리가 아닐 수 없었다.

사실 지구촌의 지폐를 들여다보면, 베트남과 같은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다. 사회주의권, 입헌군주국가, 이슬람 왕정국가는 건국지도자, 현존 왕이 지폐의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한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지폐의 앞에, 뒤는 찰스 다윈, 윈스톤 처칠, 아담 스미스 등 당대를 대표한 인물로 채워졌다.

몽골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던 징기스칸을 내세웠고, 말레이시아는 현 국왕이 등장한다. 입헌군주국, 왕정국가는 현왕 중심이니, 왕이 바뀌면 지폐 인물도 바뀐다. 몽골은 징기스칸의 위대성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징기스칸이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은 1990년까지 소수민족과 정치지도자들이 함께 지폐에 등장했다. 1991년 이후에는 모든 지폐가 모택동으로 바뀌었다. 소수민족을 우대하던 지폐인물 정책이 자본주의 성장이 본격화되자 사회주의 체계를 수호하려는 의도로 건국자 우대 지폐정책으로 바뀐 것이다.

하노이에 있는 호치민 집무실, '동네아저씨' 이미지 답게 집무실도 소박하기만 하다.
하노이에 있는 호치민 집무실, '동네아저씨' 이미지 답게 집무실도 소박하기만 하다. (사진=석태문)

 

호치민은 1억에 육박하는 인구를 가진 베트남에서 가장 서민적 지도자, 동네아저씨 이미지로 그들 앞에 다가섰던 유일한 지도자이다. 호치민은 50개 이상의 가명과 160개가 넘는 필명을 사용하며 종횡무진의 삶을 살았다.

그는 국민들에게 ‘호 아저씨’로 불리기를 원했다. 권위주의 시대를 경험했던 필자 세대에게 호 아저씨 이야기는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할까’할 정도로 감동 그 자체였다. 사람의 삶은 사진에도 담긴다고 했다.

◆ 시골 유교집안서 태어나…노동자 파업당시 통역중 프랑스관료에 뺨맞고 독립운동 투신

그의 사진 중에는 베트남 전통의상을 입고 폐타이어로 만든 신발을 신고 있는 모습이 있다. 깡마른 체구의 호치민. 자애로운 눈빛으로 사람을 보는 모습이다. 이 사진의 얼굴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대변하는 전쟁과 정치의 인물이 아니다. 우리 마을 옆집에 살고 있는 호 아저씨다. 주면서도 눈곱만큼도 받겠다는 기대가 없는 부모님의 마음이 담긴 표정이다.

호치민 광장의 묘소.

호치민은 1890년 베트남 중북부의 응에안(Nghe An)성의 깜리엔(Kim Lien)이라는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깜리엔은 어머니의 고향마을로 호치민은 유년을 여기서 보냈다. 어머니는 그가 어릴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유교기반의 지방관리 출신이어서 유교적 품성이 몸에 배였을 것이다. 베트남 최초의 통일 왕조인 응웬 왕조의 수도인 후에(Hue)에서 아버지가 운영하던 학교의 교사도 잠시 했다.

프랑스 식민치하에 살았으나, 이때까지는 특별히 독립운동을 하지 않은 것 같다. 베트남 노동자가 파업을 벌일 때 호치민은 프랑스 관료와의 협상 통역자로 참여한다.

통역과정에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였다는 이유로 프랑스 관료에게 뺨을 맞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일이 호치민에겐 항프 활동, 조국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호치민은 후에를 떠나 다낭에도 잠시 머물렀다. 사이공(통일 후 호치민으로 개칭)에서 주방보조로 요리를 배웠다. 호치민은 1911년 스물한살 청춘의 나이에 조국을 떠났다. 호치민의 풍찬노숙 삶이 시작된 것이다.
 

◆ 21살에 조국떠나 풍찬노숙하며 견문넓혀…김규식 선생 만나, 시야 넓어져

하지만 먼 이국에서 조국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조국에 대한 절절한 사랑과 식민의 땅 베트남을 구하게 될 모티브를 얻었다. 그는 힘들었지만 베트남 국민에게는 오히려 행운이었다. 프랑스 증기선 아미랄 라투슈 트레빌호의 요리사로 근무하며 3년간 유럽 여러 나라를 다녔다.

그가 세계에 대한 견문을 넓힌 시기였다. 3년간(1914~17년)의 영국 런던 밑바닥 생활도 경험하면서 그의 사고는 한층 성숙해졌다. 1919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호치민은 파리에 정착한다.

호치민의 집무실.

28세의 청년 호치민이 마주한 전후 처리과정은 그가 지적, 사상적으로 더욱 성숙해지고, 장차 베트남의 지도자로 부상하는 기회가 되었다.

1919년 6월 베르사이유 강화회의가 열릴 때 전 세계의 약소국 대표들은 자국의 독립을 주장하기 위해 파리에 모였다. 호치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참석한 김규식 선생을 만난다. 그는 김규식 선생과 거의 매일 만났다고 한다.

호치민은 김규식 선생으로부터 해박한 세계정세 이야기, 백인중심의 서방 제국주의, 무자비한 약소국 침탈, 억압과 차별의 실상을 들었다. 처음엔 단순히 선진국에 청원하는 수준의 부드러운 투쟁을 염두에 두었던 호치민은 김규식 선생을 만나면서 달라졌다.

호치민광장의 묘소. 호치민은 화장을 유언했으나 그를 기리려는 베트남 사람들은 묘소에 생전의 모습으로 안장했다. (사진=석태문)
호치민광장의 묘소. 호치민은 화장을 유언했으나 그를 기리려는 베트남 사람들은 묘소에 생전의 모습으로 안장했다. (사진=석태문)

◆ 베르사이유 강화화의에 ‘조국해방을 위한 8항목’제출…중국홍콩태국러시아 등서 다양한 독립투쟁 전개

호치민이 매일 아침 읽었다는 목민심서도 김규식 선생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호치민은 정치범 석방, 집회·결사의 자유 등 베트남 인민의 자결을 촉구하는 '조국 해방을 위한 8항목'을 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8항목으로 인해 그는 베트남 지식인 사회에 이름을 알린다.

이후 호치민은 해외와 국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조국의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1921년에는 프랑스 식민지 인민연맹을 창설하여 약소국간 협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는 중국 남부와 태국 등 베트남 주변에서 혁명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에는 최초로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창립하였고, 중국에서는 베트남 혁명청년동지회를 결성하여 청년교육에 집중하였다. 이런 사회주의 정치활동으로 1931년 6월 홍콩에서 영국 경찰에 체포된다.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1933년 석방된 뒤에는 모스크바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석태문 박사의 칼럼은 본지와 '뉴스퀘스트'에 동시에 게재됩니다.

석태문 박사는

경북대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경상북도 능금산업 발달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구경북연구원에서 선임연구위원으로 대구경북 지역 사회 및 경제발전 관련 연구활동을 활발히 하고있으며 지난 3월부터 베트남 다낭사회경제연구원에서 연구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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