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태문 박사의 VINA프리즘] (7) 호치민의 나라(하)…실용주의, 애민정신의 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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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태문 박사의 VINA프리즘] (7) 호치민의 나라(하)…실용주의, 애민정신의 표상
  • 석태문 대구경북연구원 선임연구위원(농업경제학박사)
  • 승인 2019.07.16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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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인 자존심의 원천…세계최강 미국을 이긴 유일한 나라
- ‘이념은 통일의 수단’, ‘용서와 호혜’…호치민 정신을 나타내는 단어
생전의 호치민 모습. 호치민은 동네아저씨같은 모습과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로 늘 국민들과 함께 했다. 그는 겸손했지만 통일에 대한 열망과 투지는 그 누구보다 강렬했으며 그가 이끈 통일전쟁은 사후 열매를 맺었다. 호치민은 베트남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베트남인들은 ‘박호(Bac Ho, 호아저씨)로 불리기를 원한 그의 바람에 따라 주석이라 하지 않고 박호라고 부른다.

 

[인사이드비나=석태문 대구경북연구원 선임연구위원(농업경제학박사)]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호치민은 조국을 떠난 지 30년만인 1941년 베트남에 돌아온다. 조국해방을 위해 베트남 독립연맹을 결성하면서 호치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호치민(胡志明)’은 ‘깨우치는 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60개가 넘는 그의 이름에서 마지막에 깨우치는 사람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평생동안 전력을 다해 배우고 익힌 사람이었지만 ‘세상에는 배워야 할 일은 너무나 많은데 나는 여전히 작기만 하다’는 겸양이 아니었을까.

◆ 30년만의 귀국, 160여개 이름 사용 맨마지막 호치민((胡志明)’…‘깨우치는 자’란 의미

실제로 호치민은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일본어, 러시아어, 그리고 중국의 3개 방언에도 능통하였던 영민한 사람이었다. 끝없는 향학열과 유교집안에서 자란 겸양지덕(謙讓之德)이 호치민이란 이름을 짓게 하였을 것이다.

21세 청년의 나이에 조국을 떠나 51세의 장년이 되어 마주한 조국은 여전히 식민치하에 있었다. 국제정세는 급박했다. 2차 세계대전은 조국에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일본의 패망을 예상한 호치민은 친미·친중 활동을 펼친 끝에 베트남독립연맹이 임시과도정부 승인을 얻기에 이른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2월 호치민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주석으로 취임한다.

하지만 1954년 프랑스와의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승리하였음에도 열강의 간섭으로 독립국가 수립은 쉽지 않았다.

결국 제네바 회담에서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단되고 만다. 통일된 조국을 보지 못한 호치민은 “우리는 폭격위험 아래서는 절대로 협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며 간절히 통일조국을 염원하였다.

그러나 1969년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때, 불귀의 객이 되면서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호치민의 소원은 1975년 4월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자력 통일로 성취되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호치민은 자긍심의 원천이다. “너희들 미국 이겨봤어?”, “너희는 국부가 있어?”두 가지 질문에 모두 자신 있게 답할 나라가 어디일까? 쉽지않은 질문을 쉽게 던질 수 있는 사람들이 베트남인이다.

현존하는 세계최강 국가 미국을 이긴 나라, 1억에 가까운 국민 모두가 ‘호치민은 우리의 국부다’라고 외칠 수 있으니 말이다.

호치민박물관. 호치민은 분단된 베트남의 통일을 위해 미국과의 전쟁에 나선다. 호치민은 생전 통일을 보지 못했으나 그의 사후 베트남은 통일을 이룬다. 베트남은 세계 최강 미국을 이긴 유일한 나라이며 통일전쟁을 이끈 호치민은 베트남인들의 자긍심의 근원이다.
후에시의 호치민박물관. 베트남은 세계 최강 미국을 이긴 유일한 나라이며 통일전쟁을 이끈 호치민은 베트남인들의 자긍심의 근원이다.

◆ 친미•친중활동…2차대전 종전후 베트남민주공화국 독립선언, 주석취임

호치민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완결된 것은 아니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란 평가가 일치하기도,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프랑스 관리에게 얻어맞은 뺨 사건이 그의 독립투쟁의 시초였다.

그는 구소련을 공산주의 종주국으로 여겼다. 중국은 베트남 공산당을 지원해준 형님쯤으로 생각했다. 미국은 현존하는 최강의 패권국가임을 잊지 않았다. 이들 세 나라의 비위를 맞추고 손잡기 위해 노력했다.

모두 조국 베트남 독립에 불가피한 나라들이었고, 이들의 실질적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호치민에게 이념은 조국 독립을 위한 수단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호치민을 평가하는 단어들도 많다. 민족주의, 혁명, 평등, 자유, 유교적 윤리 등 다양한 단어들이다.

모두 20세기를 살았던 사람들이 치열하게 다투었던 핵심가치들이다. 그러나 호치민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하나의 단어로 서(恕)에 주목한 사람도 있다. 용서하고, 헤아려 동정하고, 깨닫고, 밝게 알게 된다는 뜻이다.

서(恕)는 동양의 언어이기에 서양사람에게 설명하려면 호혜(reciprocity)가 적당하다고 한다. 호혜는 가족, 작은 마을 공동체에서 가능한 개념이다. 가족 간에, 함께 사는 마을 주민 간에는 내가 가진 것을 주었다고 돌려받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이웃이 어려움에 처하면 자연스레 부조하는 것이 호혜이다. 호혜적 활동이 호치민이 수행한 독립운동이자, 공동체 정신, 민족주의 사상의 발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 세계최강 미국을 이긴 유일한 나라…호치민, 베트남인의 자긍심 원천

하노이에 가면 호치민 광장이 있고, 호치민 묘소가 있다. 생전에 그가 주석으로 집무했던 주석궁과 작은 집무실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관공서나 공공기관의 사무실, 회의장에는 필수품처럼 흉상이나 동상이 있다. 호치민 박물관이 세워져 있는 지역도 적지 않다.

통일정부는 사이공시를 호치민시로 이름을 바뀌었다. 그가 베트남 독립을 이끈 국부이기에 가능한 일들이다. 베트남인들에게 호치민은 한없이 자애로운 아버지이고, 아무리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영원한 스승이다.

민족주의자로 조국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그는 베트남인들에게 대가 받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이웃 아저씨인 ‘호 아저씨’(Bac Ho=박호)로 불리기를 원한 그의 바람에 따라 베트남 사람들은 그를 주석이라 하지 않고‘박호’라고 부른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화장하라’고 유언했다. 조국 독립을 위해 했던 일이 아무리 많아도 돌려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 자신을 기억하지 말라는 명령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다른 나라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그는 거대한 묘소에 생전의 모습으로 안장되어 있다.

호치민 흉상. 관공서, 공공기관 등은 어디에나 호치민 흉상이나 동상이 있다. 베트남인들은 ‘박호(Bac Ho, 호아저씨)로 불리기를 원한 그의 바람에 따라 주석이라 하지 않고 박호라고 부른다. (사진=석태문)
호치민 흉상. 관공서, 공공기관 등은 어디에나 호치민 흉상이나 동상이 필수품처럼 있다. (사진=석태문)

◆ ‘이념은 통일의 수단’ 실용주의, 애민정신…주석 대신 Bac Ho(박호, 호아저씨)로 불려

세상에는 국부 반열에 올랐지만 감히 국부라 칭하기 어려운 지도자도 적지 않다. 모택동은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하였으나 문화대혁명의 오점이 있다. 흑묘백묘론의 실용주의자 등소평은 천안문 사태의 아픔이 있다.

필자의 상식 부족으로 적합한 사례를 찾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어떨까? 김구 선생과 이승만 대통령, 또 박정희·김대중 두 분 대통령을 더하여 국부를 가릴 수 있을까?

묘한 대비가 떠오른다. 호치민 사후 6년 뒤에 베트남은 통일 조국을 이루었다. 최후의 전투 노량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뒤 왜적이 퇴각하였다.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가 같은 듯 다른 점도 많아서 두 영웅의 죽음을 직선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생전에 두 영웅의 삶 속에서 볼 수 있었던 충효와 애민, 민족주의, 그리고 똑같이 가졌던 실용주의 사고는 몇 백 년의 시공 차이에도 일치하는 가치들이다.

베트남 경제가 날개를 날았다. 미·중 무역전쟁으로 가장 큰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다. 우리는 베트남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한 나라이다. 한-베 두 나라의 경제협력이 극대화하고 있다.

한반도와 베트남의 두 영웅이 추구했던 실용과 애민사상은 좌우 이념 알력을 넘어서는 가치들이다. 실용과 애민·애족의 한반도를 위해 호치민의 나라, 베트남이 주고있는 교훈을 되새길 때이다.     

석태문 박사의 칼럼은 본지와 '뉴스퀘스트'에 동시에 게재됩니다.

석태문 박사는

경북대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경상북도 능금산업 발달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구경북연구원에서 선임연구위원으로 대구경북 지역 사회 및 경제발전 관련 연구활동을 활발히 하고있으며 지난 3월부터 베트남 다낭사회경제연구원에서 연구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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