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용의 재계춘추(財界春秋)] (10) 경제인, 그들은 혁명가였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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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용의 재계춘추(財界春秋)] (10) 경제인, 그들은 혁명가였다(하)
  • 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 승인 2020.02.25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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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경제사에 유례없는 경제혁명 성공의 그림자…정경유착과 세습경영
- 반기업 정서, 규제강화의 원인으로 작용…후계자들의 과제

1980년 9월9일 전경련회장단회의에서 정주영, 이병철, 김우중 회장등이 참석해 현안을 논의하고 있다. 창업1세대들은 인재육성에 힘썼고 그들과 함께 세계경제사에 유례없는 경제혁명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핏줄을 후계자로 선택하는 핏줄경영가 정경유착은 성공의 그림자로 남았다.

한국판 산업혁명의 진앙지가 애국심이었다면 이를 수행해야 할 혁명동지의 발굴은 혁명가들에게 시급하고도 당면한 과제였다.

이병철 삼성 회장은 1980년 전경련 강의에서 자신이 한 일의 80%는 인재를 찾고 키우는 일 이라고 했다. 지금은 사라진 여의도의 옛 전경련회관 3층에 마련된 특별강연장이었다. 당시 전경련 신입사원이었던 필자도 잠깐 들러 준비를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나에게 이병철 회장은 신입사원 면접때 관상보는 이를 배석시킨다는 야릇한 인물로 비춰졌다.

그럼에도 삼성은 한국에서 사원을 공개채용(1957년)한 최초의 기업이다. 체계화된 인사고과제도를 만들었고(1974년), 국내최초로 그룹연수원(1982년)을 설립했다. 오늘날 우리경제의 변화에 삼성의 기여를 인정한다면 이는 이병철의 인재육성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하겠다.

◆인재를 육성하고 그들과 함께 혁명을 이끌었던 창업세대들

삼성이 신입사원을 공채로 선발하는 바람에 이병철이 초대회장을 맡은 전경련도 신입사원을 공채로 채용했다. 민간경제단체 중에는 최초였고 유일했다. 다른 단체는 민간이라 하기에는 부끄러울 정도로 낙하산과 정실, 청탁이 판을 쳤다. 필자도 1980년에 공채 13기로 전경련에 입사했다.

당시 들은 바로는 청탁을 배격하기 위해 중앙우체국 사서함으로만 접수를 받았다고 했다. 이병철의 뒤를 이은 전경련의 회장 어느 누구도 자기회사 사람을 전경련에 보내지 않았다. 그러니 낙하산도 없었다. 경제4단체중 가장 막둥이였던 전경련이 재계의 맏형으로 등극한 이면에는 역대 회장들의 인재관에 힘입은바 컸다.

그런데 인재라는게 강바닥의 모래같이 지천에 널려있어서 퍼내기만 하면 담아지는게 아니었다. 내생적 성장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건국직후에 도입한 교육제도가 한국에서 풀뿌리 혁명가들의 양성에 큰 기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서울대 김세직 교수에 따르면 초등교육의 의무화가 추진되면서 글읽기와 산수를 읽힌 새로운 인적자원이 형성됐다. 이렇게 자원이 된 노동력을 혁명의 전사로 그릇에 담은 것이 기업가였다. 이들이 1960년대 초부터 대거 현장에 투입된 결과 성장률이 연 8%대로 급격히 상승했다. 그것도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한 세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증가한 것이 한강의 기적, 즉 혁명적 변화의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성장의 중심에 사람을 놓는 방식은 그 시대 혁명가들에게는 새로운 방식은 아니었다. 비교우위의 관점에서 보면 자원, 자본, 기술이 없는 한국이 그나마 경쟁력 있는 부분은 양질의 풍부한 인적자원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외국과의 경제협력을 추진하는데도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1983년 8월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실린 대우그룹 광고. 6페이지에 걸친 이 광고에서 김우중 회장은 대우그룹 성장의 원동력은 인재 라며 그들을 사업파트너로 해달라고 강조했다. 정주영, 이병철, 김우중 등 창업세대들은 인재육성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 인재들과 함께 성장을 이끌었다.

1980년대까지 전경련은 해외 30여개 국가와 민간경제협력위원회를 가지고 있었다. 대개 격년으로 합동회의를 개최하고 공동성명을 채택해 발표했다. 한마디로 민간이 가진 서로의 강점을 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협력을 강화하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거의 모든 공동성명은 한국의 우수한 인적자원과 상대국의 자본, 자원 등을 결합해 제3국시장을 개척하자는 구절이 들어 있었다. 대개 선진국이었던 상대방도 이견이 없었으니 실제로 한국의 인재들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경쟁력의 우위를 인정받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정경유착권위주의 정권도, 민주화된 정권에서도 형태만 다르게 계속

아시아의 4룡으로 한국경제가 크게 도약하고 있을 때인 1983년 8월,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 브스(Forbes)에 특이한 광고가 게재됐다. 여섯페이지에 걸친 파격적인 기업광고는 한 사람의 사진이 실린 첫 페이지가 단연 주목을 끌었다. 광고모델은 김우중. 광고주인 대우그룹의 회장이었다.

그는 인사말을 통해 “대우가 창업16년의 어린 기업이지만 연매출 33억달러에 달하는 국제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며 성장의 원동력을 인재양성에서 찾고 마지막에는 성실하고 유능한 대우의 인재들을 사업의 파트너로 해줄 것을 자랑겸 요청했다. 그다음에 다섯 페이지에 걸쳐 와이셔츠, 쇄빙선, 크레인, 타이어 같은 대우의 제품들이 소개됐다.

광고의 모든 페이지 밑에는 굵은 가로줄에 ‘Good People makes Good Partners’라고 명기 돼 있었다. 급속도로 뻗어나가는 혁명가 김우중에게도 가장 큰 자산은 인재였고 그걸 자신있게 국제사회에 자랑할 정도로 한국의 인적자본은 풀뿌리에서부터 경쟁력이 있었다.

SK의 최종현 회장은 SK의 전신인 선경(鮮京)의 사훈을 아예 ‘인간위주의 경영’으로 정했다. 그가 SK의 정치자금 사건으로 검찰조사를 받을 때의 일화가 있다.

검사가 최 회장에게 정치자금을 얼마나 제공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사장이 알아서 했다. 나는 모른다”고 했다. 검사가 “월급쟁이 사장”이 어떻게 알겠느냐고 되묻자 최 회장은 “월급쟁이가 아니라 사업동지”라며 정색을 하며 반박했다고 했다.

같은 시기 “머슴이 뭘 아느냐”며 회장이 아랫사람을 하인 취급했던 한보그룹은 공중분해됐다. 혁명의 성공여부는 혁명의 전사를 어떻게 보느냐는 인재관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혁명가들이 성공에 도취해 간과한 것이 있었다.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은 1981년 한국의 기업인들이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것을 보고 경악했다. 또 1983년 중국 민항기의 납치사건에서 한국의 민간항공사 대표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에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일은 기업인이 하고 공치사는 정부가 하는 나라가 한국이라는 생각도 했다. 결국 경제와 정치, 이 두 분야의 불균형한 상관관계가 정경유착의 씨앗이 됐다.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민주화된 권력에서도 정경유착은 형태만 달랐을 뿐 끈질기게 나타났다. 혁명에 대한 시민사회의 지지도 그만큼 식어질 수밖에 없었다. 반(反)기업 심리가 높아지고 규제가 강화된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고 이에따라 혁명의 효율성도 현저히 떨어졌다.

◆핏줄경영은 창업자들의 부정적 유산…후계자들 일탈행위와 편법승계로 문제악화

또 하나 그들이 소홀했던 것은 혁명의 후계자 문제였다. 정치혁명의 주도자들은 그 후계자를 가족중에서 고르지 않았다. 영국의 시민혁명도,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도 후계자는 가족이 아니었다. 혁명을 가능케한 시스템이 완성된 후에는 그 시스템 안에서 자유로운 경쟁과 토론을 통해 후계자가 선정됐다.

그들의 가치와 철학이 문화로 승계되었지 핏줄로 이어지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세계경제사에 유례없는 혁명을 일으켰던 한국의 경제인들은 거의 모두 핏줄을 후계자로 택했다. 2세대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런데 3세대, 4세대까지 넘어오면서 지배구조의 개선이라는 이름으로 역공이 들어왔다. 거 기다 후계자들의 개인적 일탈과 편법적 승계 방식에 대한 비판이 고조됐다. 근거가 있든 없든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고 전문경영인 체제로 이행해야 된다는 사회적 요구가 거세어졌다.

만약 1세대 경제혁명가들이 지배구조의 문제까지 염두에 두었더라면 분명히 이런 방식을 택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쉬움이 드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너희들의 문제는 너희들이 풀어라’라는 과제를 남기고 창업주 1세대들은 퇴장하고 신격호 회장을 마지막으로 그들의 시대를 접었다.

돌이켜보면 혁명적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 우리경제가 혁명가적 기질을 가진 경제인들을 맞이한 것은 행운이었다. 제도와 규율이 모두 일천했음에도 그들은 스스로의 강점을 찾아내 세계를 향해 혁명을 선도했다.

특유의 애국심에다 인적자원을 풀뿌리 혁명전사로 삼아 변화를 일궈냈다. 창업주 1세대가 남긴 공간을 무엇으로 채워 다시한번 혁명적 변화를 일으킬지는 이제 남아있는 우리의 몫이 됐다.

권오용은

고려대를 졸업했으며 전국경제인연합회 국제경제실장•기획홍보본부장, 금호그룹 상무, KTB네트워크 전무를 거쳐 SK그룹 사장(브랜드관리부문), 효성그룹 상임고문을 지낸 실물경제와 코뮤니케이션 전문가다. 현재 공익법인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로 기부문화 확산과 더불어 사는 사회 분위기 조성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대한혁신민국(2015), 권오용의 행복한 경영이야기(2012),가나다라ABC(2012년), 한국병(2001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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