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로의 고사성어로 보는 세상] (42) 봄 정취와 茶半香初 水流花開(다반향초 수류화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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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로의 고사성어로 보는 세상] (42) 봄 정취와 茶半香初 水流花開(다반향초 수류화개)
  • 이형로
  • 승인 2021.04.19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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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를 반쯤 마셔도 향기는 그대로이고, 그저 꽃은 피며 시냇물은 흐르네
- 참좋은 계절 봄이 왔지만 코로나사태로 힘든 시절…녹차 한잔 앞에 두고 침잠해보면 어떠리!
참새 혓바닥만 하다해서 이름붙여진 작설차잎(사진 위)과 직지사 다실의 '茶半香初(다반향초) 현판. 차를 반쯤 마셨어도 향은 처음과 같다는 뜻으로 은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다향을 표현한 말이다. (사진=이형로)

내일은 봄비가 내려 백곡을 기름지게 한다는 여섯번째 절기 곡우(穀雨)다. 올해도 한꺼번에 온 봄은 한꺼번에 떨어지고 있다. 진달래•개나리꽃은 봄비와 함께 진작에 흩어지고 지금은 철쭉과 모란이 한창이다.

차나무는 보통 곡우 전후로 새싹이 돋는다. 예전부터 곡우전에 채취한 새순으로 만든 차를 '우전차(雨前茶)'라 하여 극상품으로 여겼다. 우리나라에선 찻잎의 크기가 참새 혓바닥만하다 이름 붙인 작설차(雀舌茶)가 대표적인 우전차다.

중국에는 '원숭이가 따는 차' 또는 '원숭이가 먹는 차'라는 뜻의 후아차(猴兒茶)가 있다. 운남성의 원숭이들은 봄이 되면 신이 난다. 곳곳에 먹을 새순이 많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어린 찻잎은 그들에게 최고의 먹거리이기 때문이다.

중국 운남성은 차나무의 생육에 적당한 기후여서 깊은 산속에서도 차나무가 자생한다. 무려 10m 넘게 자라는 나무가 흔하며 절벽에서 자라는 것도 있다. 원숭이 정도가 돼야 채취할 수 있는 자연산 찻잎이다.

예전에는 찻잎을 아녀자들이 채취했다. 원숭이들이나 뛰어다니는 차나무 위에서 작업한다는 것은 아무리 날렵한 나어린 처자일지라도 위험하고 힘든 작업이다. 자루를 허리에 차고 높은 나뭇가지에 올라 참새 혓바닥만한 새순을 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높은 나무에 올라가서 구슬땀을 흘리다 보면 어느덧 자루는 가득찬다. 나무에서 내려와 자루를 비우고 다시 오르기는 힘들어, 앙가슴의 옷깃을 풀어 찻잎을 넣어오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찻잎은 체온에 어느 정도 숙성이 된다. 이 찻잎으로 덖어(殺靑 살청) 만든 차가 그냥 자루에 담아 온 것보다 맛있다고 한다. 특히 처녀의 체취를 맡은 찻잎은 극상품으로 여겼다 한다.

같은 우전차라도 우리나라 작설차는 중국 찻잎과 달리 훨씬 연하며 차향 또한 중국차와는 비교를 할 수 없다. 우려낸 찻잎의 물기를 짜낸 후 조선간장 두어방울과 들기름 한방울 더해 조몰락거려 먹으면 입안가득 봄향기다. 봄나물로도 최고다.

조선에서는 작설차 때문에 차나무가 수난을 겪기도 했다. 차나무는 연평균 기온이 13°C 이상, 강우량은 1300~1500mm, 해발 200m 이하인 곳에서 잘 자란다.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은 곳이 지리산 자락인 경남 하동•사천 그리고 전남의 장흥•영암•보성군 등과 한라산 기슭으로 현재 주요 재배지이기도 하다.

어느날 하동의 백성들은 관아 몰래 차나무를 모두 베어 버렸다. 하동군은 대대로 조선 왕실은 물론 중국 황실에까지 작설차를 진상했던 곳으로 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곡우가 되면 논농사를 시작하는 농번기다. 이런 때 생업인 농사일을 제껴두고 10여m나 되는 차나무에 올라 찻잎을 딴다는 것이 얼마나 고역이겠는가. 그것도 무상인 부역(賦役)으로 말이다. 차라리 차나무가 없다면 이런 고생은 안해도 된다는 생각에서 야기된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추사 김정희의 '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정좌처다반향초 묘용시수류화개)' 작품(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참 좋은 계절 봄이 왔어도 코로나19 사태로 몸과 마음이 힘든 시절, 차한잔 앞에 놓고 추사의 경지를 생각하며 침잠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한•중•일의 다실에는 '다반향초(茶半香初)'라는 편액을 많이 걸어 놓는다. 차와 관련된 말 중에 이보다 유명한 글귀는 없을 것이다. 이 구절만을 놓고 보자면, '차를 반쯤이나 마셔도 그 향기는 처음과 같네'라 번역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이 구절 못지않게 인구에 회자되는 '수류화개(水流花開)'를 덧붙여 다음과 같은 대련(對聯)을 남겼다. 당시 중국에까지 알려진 희대의 절창(絶唱)이다.

靜坐處茶半香初 (정좌처다반향초, 정좌하고 차를 반쯤 마시다 문득 향을 사른다)
妙用時水流花開 (묘용시수류화개, 묘용의 시각에 그저 시냇물은 흐르고 꽃이 피네)

이 시는 일종의 선시(禪詩)요 오도송(悟道頌)이다. 정좌처(靜坐處)와 묘용시(妙用時), 다반(茶半)과 수류(水流), 향초(香初)와 화개(花開)로 절묘한 댓구를 이룬다. 공간의 정적인 분위기와 시간의 동적인 현상이 신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다반향초'를 '차를 반쯤 마시다 문득 향을 사른다'로 풀었다.

자, 우리도 한번 이 시의 주인공이 되어 보자. 시공이 고요한 가운데 명상을 하며 차를 마신다. 입안에 가득 밴 차의 향기를 음미하다 문득 향을 사룬다. 선정 속에서 오묘한 작용이 일어난다. 입안의 차향과 방금 피운 향과의 조화다. 다선삼매(茶禪三昧)에 빠져든다.

내가 저기 흐르는 물인가, 피고 지는 꽃인가. 노자의 말대로 '스스로 그저 그렇게(自然而然)' 강물은 흘러가고 꽃이 피고 질 뿐이다. 이렇게 주인공과 자연은 혼연일체가 된다. 앞 구절에서 인위적인 조화를 표현했다면 다음 구절은 무위자연이다. 이쯤되면 말과 글은 더이상 필요치 않아 버려도 된다.

추사는 조선후기 고승이자 다도 정립자이기도한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와 신분과 지위를 뛰어넘어 교유하였다. 동갑내기이자 유•불•선을 통달한 이들은 차를 매개로 서로의 심득(心得)을 함께 나누었다.

이들만큼의 경지가 아니라면 또 어떠랴. 생명과 희망의 봄이 왔어도 코로나19 사태로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든 시절, 녹차 한잔 앞에 놓고 침잠(沈潛)해보는 것도 괜찮으리라.

이형로는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대만대학 철학연구소와 교토대학 중국철학연구소에서 수학 후 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다. 현재 덕수궁에서 근무하며 스스로를 '덕수궁 궁지기'라고 부른다.
저서로는 ‘궁지기가 들려주는 덕수궁 스토리’, ‘똥고집 궁지기가 들려주는 이야기’(2018년)에 이어 2019년말 '궁지기가 들려주는 꽃*나무의 별난 이야기' 1권을 펴내기 시작해서 현재 7권을 준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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