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로의 고사성어로 보는 세상] (46) 일제 강제노역 피해 소송과 묘각재판(猫脚裁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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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로의 고사성어로 보는 세상] (46) 일제 강제노역 피해 소송과 묘각재판(猫脚裁判)
  • 이형로
  • 승인 2021.06.14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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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에게 책임 물으려 내주장 지나치게 내세워선 안돼
- 국민의 사법에 대한 신뢰도, OECD국가중 가장 낮은 이유 깊이 새겨봐야
묘각재판(猫脚裁判)은 ‘고양이 다리 재판’에서 유래됐다. 다친 다리를 싸맨 헝겊에 불이붙자 당황한 고양이가 목화를 보관한 창고에 뛰어들어 발생한 화재의 책임은 헝겊싸맨 다리가 아니라 창고에 뛰어들게한 3개의 성한 다리에 있다는 고을 원님의 판결은 판단기준이 다르면 결과가 달라진다는 점을 말해준다.

지난 7일 서울중앙지법 재판부가 일제 강제노역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 각하 판결을 내렸다. 일제의 불법행위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으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과는 배치된다는 점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일본기업들에 강제집행이 이뤄지면 일본은 물론 미국과의 관계도 훼손될 수 있다는 사법 외적 판단과 함께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받은 돈이 세계경제사에 한강의 기적이라고 기록되는 눈부신 경제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는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따랐다는 판결문 내용이 비판받고 있다. 

‘솔로몬의 판결’은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지혜로운 판결의 대명사다. 우리 조상들에게도 이에 못지않은 명판결들이 있다. 

조선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편찬한 필원잡기(筆苑雜記)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함우치(咸禹治, 1408~1479)가 전라감사가 되었을 때 어느 양반집의 형제가 가마솥이 자기 것이 크네 작네 다투다 소송을 했다. 함우치가 아전을 시켜 문제의 가마솥 두 개를 가져와 깨뜨려서 똑같은 무게로 나눠주라고 명령하자 형제는 굴복하고 소송은 마침내 중지되었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가마솥은 귀하고 가치가 있어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의 가마솥을 빼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개인이 만들기도 어려운 가마솥을 두 개나 깨뜨려 나눠주라고 판결하니 형제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어린아이는 아니었지만 솔로몬 왕의 재판과 비슷한 결말이다.

고려 공민왕 때 문익점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오며 목화씨를 가져다 심은 덕분에, 그의 고향인 경남 산청은 옛부터 목화가 특산품이었다. 동네 친구 네 사람은 똑같이 투자해서 목화 장사를 시작했다. 값이 쌀 때 창고에 쌓아두다 보니 쥐가 돌아다니며 오줌을 싸서 누렇게 되자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의논 끝에 고양이를 한 마리 사서 넷이서 각각 다리 하나씩을 보살피기로 했다. 어느날 고양이가 앞발을 다쳐 그 발을 맡은 친구는 약을 바르고 헝겊으로 감아주니 절름거리면서도 잘 돌아다녔다. 그러다 아궁이 앞을 지나다가 상처를 싸맨 헝겊에 그만 불이 붙었다. 당황한 고양이가 창고로 뛰어 들어갔고 목화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여 잿더미로 변했다.

엄청난 손해가 나자 세 사람은 다친 다리 책임자에게 배상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세 사람에게 밉보인 친구였는데, 이참에 잘됐다 하고 뒤집어씌우려는 속셈이었다. 그 친구는 창고에 불을 낸건 공동으로 산 고양이 때문이고 함께 손해를 본 터에 무슨 말이냐고 따졌다. 티격태격 싸우다 결말이 나지않자 그들은 원님을 찾아갔다.

세 사람은 원님 앞에서도 같은 주장을 계속하며 친구를 몰아세웠다. 사정을 파악한 원님은 오히려 목화값은 너희 세 사람이 물어줘야 한다고 호통을 쳤다. 놀란 친구들이 지금 장난하시냐고 묻자 원님은, 고양이가 불붙은 다리를 끌고 갈 때 어떤 다리를 사용했겠느냐고 물었다. 그야 당연히 성한 다리였을 거라고 하자, 원님은 세 다리로 뛰어 가서 불을 냈으니 책임은 너희들에게 있다고 판결을 내린 것이다. 세 사람은 유구무언 할 말이 없었다.

어느 현명한 원님의 '고양이 다리 재판'이라는 이야기의 줄거리다.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의 순오지(旬五志)에 '묘각재판(猫脚裁判)'이라 소개된 이후 야담집에 널리 전해지는 고사다. 어떤 일이든 판단하는 기준에 따라 그 결과가 바뀔 수 있다는 교훈과 사건의 잘못을 남에게만 책임 지우려 자기 기준을 주장하는 자들을 비유해 쓰이는 말이다.

이렇게 조선시대의 송관(訟官)이 지혜로운 재판도 했겠지만 부정적인 방향의 자의적 재판도 배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런 판결을 보고 들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까?

우리나라가 OECD(경제개발협력기구) 국가가운데 국민의 사법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낮다는 불명예스러운 조사결과가 있다. 사법에 대한 신뢰도가 낮은 이유중 가장 큰 요인은 아마도 법관이 ‘법률과 양심’에 따라’ 재판하지 않고 다른 요인을 재판에 반영하는데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예컨대 동일한 사안이나 범죄에 대한 판결이 재판관에 따라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판결에 법률과 양심보다는 수치스러운 ‘전관예우’가 크게 작용하거나 사사로운 연고 관계 혹은 정치적인 고려가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때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섞여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도 구분이 안가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사람 사이의 이러한 온갖 분쟁이 법률적으로 자초지종을 따져도 원고와 피고는 서로 불만인 경우가 다반사다. 이럴 때 무엇이 중요한 가치인가를 분별하는 솔로몬 못지않은 '원님의 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답답한 마음에서 한마디 붙여 본다. 

이형로는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대만대학 철학연구소와 교토대학 중국철학연구소에서 수학 후 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다. 현재 덕수궁에서 근무하며 스스로를 '덕수궁 궁지기'라고 부른다.
저서로는 ‘궁지기가 들려주는 덕수궁 스토리’, ‘똥고집 궁지기가 들려주는 이야기’(2018년)에 이어 2019년말 '궁지기가 들려주는 꽃*나무의 별난 이야기' 1권을 펴내기 시작해서 현재 7권을 준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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