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로의 고사성어로 보는 세상] (53) 횡거철피(橫渠撤皮),지지불태(知止不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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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로의 고사성어로 보는 세상] (53) 횡거철피(橫渠撤皮),지지불태(知止不殆)
  • 이형로
  • 승인 2021.09.27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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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러날 때를 알고 그만둘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
- 매스컴에 많이 오르내리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
성담((性潭) 스님의 작품 ‘知足不辱 知止不殆(지족불욕 지지불태)’. 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만둘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다.
성담((性潭) 스님의 작품 ‘知足不辱 知止不殆(지족불욕 지지불태)’. 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만둘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다.

해가 갈수록 여름이 더 더워진다는 느낌이다. 올여름도 무척 더웠다. 그나마 더위를 견디게 해준 것은 매미의 청량한 울음소리 덕분이었다. 그런데 참 신기하기도 하다. 그렇게 울어대던 매미들이 처서가 지나자 약속이나 한 듯 하루 아침에 울음을 뚝 그친다. 

그래서 서진(西晉)시대의 육운(陸雲)은 한선부(寒蟬賦)를 지어 매미의 신의를 칭송했나보다. 그는 늦가을의 매미를 ‘지덕지충(至德之蟲 지극한 덕을 갖춘 곤충)'이라며 군자가 마땅히 지녀야할 다섯 가지 덕(五德)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반복적인 울음소리는 글을 읽는 선비의 문덕(文德), 수액만 먹고 살기에 청덕(淸德), 다른 벌레와 달리 농부의 곡식을 탐하지 않으니 염덕(廉德), 집을 짓지 않으니 검덕(儉德), 마지막으로 물러날 때를 알고 신의를 지키니 신덕(信德)이 있는 곤충이라 했다.

한낱 벌레인 매미조차도 신의를 지키려 기꺼이 그 자리를 가을의 전령사인 귀뚜라미에게 양보하고 있다. 곤충이니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치부하더라도, 우리 인간들 가운데에도 매미처럼 때를 아는 인물들이 있다.

일본 나라의 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은 킨테츠그룹에서 운영하는 사립미술관이다. 이곳에는 한중일 삼국의 그림과 도자기 등이 유명한데 특히 국보급 고려불화가 다수 소장돼있다. 소장품 중에는 조선후기 왕실 자제를 교육하기 위해 제작된 학습서 ‘예원합진(藝苑合珍)’이 있다.

이 책에는 '횡거가 호랑이 가죽을 거두다'라는 의미의 '횡거철피(橫渠撤皮)'란 제목의 그림이 있다. 오른쪽 페이지는 화원화가 양기성(梁箕星)의 섬세한 필치로 그린 그림이다. 정자 안에서는 학자 타입의 세 사람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열띤 토론을 하고 있다. 앞뜰에는 주인이 깔고 있던 것인지, 아니면 손님에게 선물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자가 호피를 들고 있다. 그림 왼쪽 페이지에는 서예가이자 학자인 윤순(尹淳)의 필적으로 주자가 편찬한 이정어록(二程語錄) 17권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다.

일본 나라의 미술관 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에 소장된 조선후기 왕실자제 학습서 예원합진(藝苑合珍). 책에는 ‘물러날 때를 알고 물러나는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의미하는 ’횡거철피(橫渠撤皮)를 의미하는 그림과 성리대전의 글이 있다.  

장횡거가 서울에서 호피에 앉아 주역을 강론하니 듣는 이들이 많았다. 어느날 저녁 정호, 정이 두 형제가 와서 주역에 대해 견해를 나누었다. 다음날 횡거는 호피를 거두고는 "내가 지금껏 강론한 것은 횡설수설이었다. 정씨 형제가 어제 와서 주역의 본체를 확실히 밝히니, 내가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이다. 그대들은 그들을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라 하고 고향인 섬서로 돌아갔다. <성리대전(性理大全)>

橫渠在洛 坐虎皮說周易 聽從甚衆(횡거재락 좌호피설주역 청종심중)
一夕二程先生至論易 次日橫渠撤去虎皮曰(일석이정선생지논역 차일횡거철거호피왈) 
吾平日與諸公說者皆亂道 有二程近到(오평일여제공설자개란도 유이정근도)
深明易道 吾所不及(심명역도 오소불급)
汝輩可師之 乃歸陝西(여배가사지 내귀섬서) 

이글에서 '횡거철피'란 고사성어가 유래한다. 횡거는 장재(張載, 1020~1077)의 호이며, 호피는 학문을 강론하는 스승의 자리를 뜻한다. 북송(北宋) 당대 최고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장횡거가 후배인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의 능력을 한눈에 알아보고 선뜻 자리를 내주고 떠나갔다는 일화다. 이는 중국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학자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는 물러난 뒤에도 정씨 형제와 더불어 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대학자로 존경을 받았다.

또한 북송의 구양수는 답매성유서(答梅聖兪書)에서 "소동파의 글을 읽으니 절로 식은 땀이 납니다. 통쾌하고 통쾌합니다. 이 늙은이가 이제 길을 비켜주어서 그가 두각을 드러내도록 해야겠습니다. 이런 후학이 있어 너무 기쁩니다"라 적고있다. 구양수는 비록 호피를 거둔 것은 아니지만 후학의 앞길을 터주었다. 과연 일세를 풍미한 문종(文宗)다운 태도다.

고려말 유가 참고서라고는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注)밖에 없던 시절 포은 정몽주는 경서의 뜻을 정확히 해석하고 이를 설명할 때도 막힘이 없었다. 그의 스승인 목은 이색(李穡)은 "포은은 강론할 때 고금의 여러 이론을 들어 설명하였으며 이론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라며 정몽주를 스승인 자기조차 뛰어넘는 '동방이학의 시조(東方理學之祖)'라고까지 극찬했다. 스승으로서 제자에 대한 칭찬치고는 과도한 감이 없지 않지만, 이로써 호피를 거두는 것을 넘어 송두리째 내주고 만다.

이형기(李炯基, 1933~2005) 시인은 시 '낙화'에서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노래했다. 꽃은 떨어져야 할 때 미련없이 떨어져야 축복에 싸여 가는 길이며 또한 아름다운 길이다.

귀뚜라미에게 자리를 내준 매미처럼, 정씨 형제를 만나서 호피를 거둔 횡거처럼, 소동파의 앞길을 열어준 구양수처럼, 제자 포은을 받든 목은이 그런 길을 갔다.  

대학에서는 지지(知止) 즉 '분수에 넘치지 않도록 그칠 줄 알라'고 했으며, 노자는 도덕경(44장)에서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만둘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길이 오래도록 편안할 수 있다(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고 설파했던 것이다.

세상사람 모두의 눈에 물러나야할 사람으로 비치는데도 본인만 모르거나 알고도 구질구질하게 욕심을 부리면 그 끝은 십중팔구 패가망신이다. 요즘 매스컴에 많이 오르내리는 ‘인물’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이형로는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대만대학 철학연구소와 교토대학 중국철학연구소에서 수학 후 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다. 현재 덕수궁에서 근무하며 스스로를 '덕수궁 궁지기'라고 부른다.
저서로는 ‘궁지기가 들려주는 덕수궁 스토리’, ‘똥고집 궁지기가 들려주는 이야기’(2018년)에 이어 2019년말 '궁지기가 들려주는 꽃*나무의 별난 이야기' 1권을 펴내기 시작해서 현재 8권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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