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로의 고사성어로 보는 세상](110) 홍행출장(紅杏出墻) 유원불치(遊園不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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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로의 고사성어로 보는 세상](110) 홍행출장(紅杏出墻) 유원불치(遊園不値)
  • 이형로
  • 승인 2024.04.0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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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 살구꽃축제… 찬란한 봄날의 정취 물씬
- 담장 살며시 넘은 꽃가지, 고궁의 품격 더해줘
1904년 경운궁(慶運宮) 대화재 때에도 살아남은 덕수궁의 살구나무. 석어당의 나무(아랫사진)는 5~6년 전만해도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빽빽하게 피어 주위를 압도하던 꽃이 이제는 하늘이 훤히 보일 정도로 성기게 피지만 ‘담장 너머로 살며시 내민 꽃가지(紅杏出墻)'는 여전히 매력적으로 고궁의 품격을 더해준다. (사진=이형로)

지난주 금요일 덕수궁 꽃대궐을 여는 살구꽃축제가 시작됐다. 그러나 아쉽게도 매년 3월20일쯤 피던 살구꽃은 붉은 꽃망울만 맺혔을뿐 필 생각조차 하지않고 있었다. 주무관은 마음이 조급해져 수시로 살구나무를 살펴보곤 했다.

다행히 일요일에는 햇볕을 많이 받는 가지부터 분홍색 꽃이 터지기 시작해 이제는 만발했다. 올봄은 벚꽃도 개화시기가 늦어 진해벚꽃축제도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 한다. 

덕수궁 석어당 앞뜰의 살구나무는 1904년 경운궁(慶運宮, 1907년 고종 강제퇴위 이후 덕수궁으로 개칭) 대화재 때에도 살아남았다. 그래서 그런지 나이에 비해 많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고목이다.

선조가 승하하자 광해군은 즉조당에서 즉위한 후 재건이 끝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며 계모인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으로 강등시켜 석어당에 유폐시킨다. 인조반정 때까지 8여년을 석어당 담장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게 하고 연명할 식량만 대주었다.

하루는 시녀들이 살구나무 밑에 앉아 쌀을 이는 조리조차 없다며 한탄하자, 나뭇가지에서 듣고 있던 까마귀가 박씨를 물어다 주어 그것을 심어 조리로 대용했다는 전설같은 얘기가 전해진다. 까마귀  일화는 '어느 궁녀의 일기'라 전해지는 계축일기(癸丑日記)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다만 살구나무 밑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필자의 각색이다.

거의 10년을 밤낮없이 살구나무 밑 바위에 앉아 광해군에 복수의 칼날을 벼르던 인목대비, 인조반정 후 석어당 앞뜰에 멍석을 깔게하고 옥새를 전해받은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다. 광해군은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임)란 죄목을 마지막으로 인목대비와의 끈질겼던 악연은 막을 내린다.

인목대비가 떠난 후 석어당 주변을 정리하던 궁지기들은 살구나무 밑 바위에서 이상한 자국을 발견한다. 비가 내리거나 물을 뿌리면 사람 엉덩이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인목대비의 한이 얼마나 깊었으면 바위에까지 그런 자국이 남았을까. 그녀의 서릿발보다 차디찬 한이 스며든 살구나무가 경운궁 대화재 때도 살아남아 '불사목(不死木)'이란 별명을 얻게되었으며 그때의 그을음으로 줄기는 아직도 시커멓다.

그런데 사실 살구나무 밑의 바위는 1983년 창경궁을 정리할 때 가져온 것이며, 살구나무 줄기는 원래 자라면서 시커멓게 변한다. 이 현대판 전설은 싱겁고 딱딱한 역사적인 일화에 필자가 양념삼아 집어넣은 것이다.

덕수궁 살구꽃축제가 지난주 시작됐다. 흐르러지게 핀 살구꽃이 찬란한 봄날의 정취를 물씬 느끼게 해주고 있다. (사진=이형로)

석어당 살구꽃은 5~6년 전만 하더라도 밑에서 하늘이 안보일 정도로 빽빽하게 피어 주위를 압도했으나 이제는 하늘이 훤히 보일 정도로 성기게 핀다. 나무도 세월 앞에선 어쩔 수없나 보다. 그러나 담장 너머로 살며시 뻗은 가지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이를 '붉은 살구꽃 가지 담장을 넘다'라는 뜻의 '홍행출장(紅杏出墻)'이라 한다.

이 성어는 남송시대에 자연을 주로 노래했던 강호파 시인 섭소옹(葉紹翁, 1194~?)의 '유원불치'(遊園不値; 장원에 놀러 갔다가 주인을 만나지 못하다)라는 시에서 유래한다.

應憐屐齒印蒼苔(응련극치인창태, 돌이끼에 행여 발자국 남을까 조심조심)
小扣柴扉久不開(소구시비구불개, 똑똑 살며시 두드려도 사립문은 열리지않네)
春色滿園關不住(춘색만원관부주, 그때 뜰 가득찬 봄기운 가눌 수없어)
一枝紅杏出牆來(일지홍행출장래, 살구꽃 붉은 가지 하나 담 밖을 궁금해하네)

정원이 잘 가꾸어진 친구의 집에 봄을 즐기러 갔으나 그 집 사립문은 살짝 잠겨있다. 혹시나 하고 한참을 기다리다 살짝 두드려 봤지만 문을 열어주는 이 아무도 없다. 봄기운을 만끽하리라 잔뜩 기대를 하고 간 방문객은 여간 서운치 않다.

미련을 떨치지 못한 아쉬움으로 친구의 집을 한바퀴 돌아본다. 그때 담장 너머로 붉은색 살구꽃 가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의 마음은 금방 희열로 가득 찬다. 살구꽃 한 가지로 친구집 정원에 가득한 봄빛의 충만함과 화사함을 충분히 느낄 수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뜰 안 가득 흐드러지게 핀 봄꽃을 보았더라면 다소 버거운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봄날의 설렘과 봄꽃의 감동 그리고 갈등을 이보다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아름다운 시는 곧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명시로 각광을 받았다. 물론 '홍행출장'이라는 표현이 아름다운 시에서 나온만큼 그 뜻은 봄기운이 충만하거나 아름다운 봄꽃에 대한 비유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것마저도 가만히 두지 않는다. 본뜻과 어울리지 않는 듯한 '유부녀의 바람기'를 표현한 말로도 쓰고 있으니 말이다. 봄날의 정경을 맛깔스럽게 읊은 시에서 나온 홍행출장 성어가 유부녀의 바람기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쓰인다는 것이 다소 아이러니컬하다. 

그 뜻을 음미해보면 전혀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어여쁜 여인을 꽃에 비유하는 것은 흔한 표현이므로, 꽃가지가 담장 너머로 나와있는 것을 보고 여인이 집밖을 기웃거리는 광경을 연상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앙증맞고 예쁜 살구꽃이니 단아하고 얌전하게 보이는 여인의 분위기와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살구꽃이 살짝 담장 너머로 나와있는 모습에서 그 여인이 현실 그러니까 집안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밖에서 뭔가 갈구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렇거나 말거나 봄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특히 덕수궁 꽃대궐에서는 한 그루의 늙은 살구나무가 아직도 고궁의 품격을 더하고 있다. 이제는 비록 늙어갈망정 올봄에도 비바람에 흩어지는 꽃잎으로 봄날의 정취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이형로는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대만대학 철학연구소와 교토대학 중국철학연구소에서 수학 후 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다. 현재 덕수궁에서 근무하며 스스로를 '덕수궁 궁지기'라고 부른다.저서로는 ‘궁지기가 들려주는 덕수궁 스토리’, ‘똥고집 궁지기가 들려주는 이야기’(2018년)에 이어 2019년말 '궁지기가 들려주는 꽃*나무의 별난 이야기'를 펴내기 시작해서 현재 9권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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