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향우 정신 깃든 제1고로, 올해말 종풍식 갖고 은퇴
- 한국경제 일으킨 자산으로 길이 보전될 것
차가운 겨울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던 1970년 새해 벽두, 영일만 황량한 모래 벌판에 마련된 연단에서 박태준 포항제철(포스코) 사장은 찬바람에 맞서 뜨거운 입김을 내뿜었다.
“포항제철은 조상의 핏값으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그로부터 3년 후 포스코는 착공 3년2개월만에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대형 용광로를 준공하고 첫 쇳물을 생산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했다. 1973년 6월7일 포항제철 본관앞 광장에서 박태준 사장은 태양열로 원화를 채화해 원화로에 보존했다. 다음날 원화봉송 주자 7명이 원화를 제선공장으로 봉송해 기념식을 갖고 오전 10시30분 1고로에 화입했다.
화입후 21시간만인 1973년 6월9일 오전7시30분, 용광로에서 쇳물이 터져나왔다. 고로 제2주상을 가득 메우고 쇳물이 나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박태준 사장과 건설요원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불렀다.
모두가 불가능하다던 제철소 건설에 성공했고 온갖 산고 끝에 출산의 기쁨을 맛보았지만 박태준은 마냥 기뻐할 수 만은 없었다. 이 제품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지, 외국에 팔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 첫해 매출 1억달러에 순이익 1200만달러를 달성해 가동 첫해부터 이익을 낸 세계유일의 제철소가 됐다. 공사도 ‘우향우’정신으로 했고 영업도 ‘우향우’정신이었다.
세계 철강업계가 영일만의 기적이라고 칭송했고 경공업 위주였던 한국경제가 중후장대(重厚長大)의 중화학 공업으로 질적 변환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이전까지 제철소는 제품 생산방식에 따라 제선-제강-압연공장 순서로 지어졌다. 하지만 포스코는 생산공장부터 건설하는 백워드(Backward)방식을 택했다. 건설공정이 짧은 압연 및 제강공장을 먼저 완성해 수입한 반제품으로 완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생기는 이윤을 나머지 공장 건설에 투자하면서 제철소를 완성한다는 계획이었다.
포스코는 1기 착공후 예상치 못한 문제에 봉착했다. 가장 큰 문제는 정치권으로부터 들어오는 외압이었다.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집권당 재정위원장이 박태준 사장에게 정치자금을 요구했다. 또 다른 정치권 실력자는 설비구매에 따른 리베이트를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박태준 사장은 외압과 부당한 요구에 굴복하지 않았다. 해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애로사항을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박태준 사장이 작성한 메모지에 서명을 해주며 소신껏 처리하라고 힘을 실어줬다.
당시 메모지는 훗날 ‘종이마패’로 불리며 외부로부터의 압력을 방어하는 정신적 힘이 돼주었다. 이를 계기로 포항제철소 1기 설비구매를 둘러싼 각종 압력은 사라졌다.
용광로 건설을 진두지휘하던 박태준 사장은 아무리 작은 부실이라도 용납하지 않았다. 부실공사의 흔적이 발견되면 가차없이 폭파해버렸다. 용광로 3기 건설 당시에는 80% 진행된 공사였지만 역시 예외를 두지 않았다. 이처럼 ‘조상의 핏값’을 진심으로 소중하게 생각한 그는 정치적 외풍, 사리사욕을 배제하고 오직 나라의 부를 쌓는 데에만 전념했다.
그런 그를 일본 철강업계의 신으로 불리는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寛) 신일본제철 회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기술을 전수해주면 우리가 타격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애국심에 나는 내 영혼까지 주었고, 대한민국의 근대화에 나의 영혼도 밑거름이 되고 싶었다.”
19세기 후반 미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이끈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는 35년만에 연간 1000만 톤 생산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박태준 회장은 폐허의 땅에서 창업 25년만에 연간 2100만톤 생산체계 구축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또 1997년 포항제철이 세계 철강업계의 대명사인 US스틸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철강업체로 부상하는 데에 공헌했다. 박태준 회장을 ‘한국의 철강왕’, ‘한국의 카네기’라고 부르는 이유다.
포항제철이 성공하자 어느 기자가 처음에 한국의 제철소 건설을 반대했던 국제금융기구의 한 관계자를 찾아가 소감을 물었다. 그는 지금도 한국에서 제철소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에 박태준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실책이었다”고 술회했다.
중국의 개방후 포항제철 같은 공장을 지어달라는 덩사오핑(鄧小平)의 요청에 이나야마 요시히로 당시 신일본제철 회장이 중국에는 박태준 같은 사람이 없어서 안된다고 완곡하게 거절한 일화는 유명하다. 박태준은 그런 사람이었다.
제1고로는 올해말 종풍식(終風式)을 갖고 은퇴한다. 그동안 제1고로에서 생산된 쇳물은 5000만톤이 넘는다. 타이타닉호를 1000척 이상 건조할 수 있는 양이다. 보통 고로의 수명이 15년인데 오랫동안 건재할 수 있었던 건 포스코의 탄탄한 기술과 철저한 관리 덕분이었다.
철강역사박물관에 남게 된 제1고로가 한국 철강산업의 길이 보존 될 유형의 자산이라면 박태준의 꿈과 애국심으로 가득 찼던 ‘우향우’정신은 한국경제를 일으킨 무형의 자산으로 영원히 기억 될 것이다.
권오용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