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로의 고사성어로 보는 세상](100) 옹리혜계(甕裏醯鷄), 대자연인(大自然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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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로의 고사성어로 보는 세상](100) 옹리혜계(甕裏醯鷄), 대자연인(大自然人)
  • 이형로
  • 승인 2023.11.06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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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넓어도 개미굴 같고, 영웅호걸도 술독 속 초파리
- 내주변 공간크기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이 좋은 계절, 자연의 소리 들어봄직
섬진(蟾津) 박용철의 작품 ‘甕裏醯鷄’(옹리혜계). 술독 속에 있는 초파리라는 뜻으로 식견이 좁은 사람을 의미하는 성어이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 주변 크기의 넓고 좁음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 일 것이다. (사진=인터넷 캡쳐)

칼럼이 어느덧 100회를 맞았다. 2년전쯤 시작한 것 같아 1회 칼럼을 검색해보니 벌써 만 4년이나 됐다. 이제는 얼마 전이라면 4~5년전이요, 좀 됐다싶으면 10여년전이 된다. 무상한 세월이다.

요즘 덕수궁 유아휴게실 옆 화장실 마당에는 용담꽃(龍膽)이 한창이다. 작년 가을 심은 줄 여겼던 용담이 동료와 대화중 벌써 3번째 가을을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필자의 건망증을 나무라기보다 무심한 세월이 서글플 뿐이다. 그런 마음을 알기나 한듯 자기를 바라보는 필자를 향해 용담꽃은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는 꽃말을 들려주고 있었다.

돌이켜보니 3년전 이맘때 휴궁한 다음날 출근하니 유아휴게실과 화장실 주변이 깔끔하게 정리돼있었다. 화장실 앞에 작은 화단을 만들고 우리나라의 대표적 가을 야생화인 층꽃과 용담을 심어놨다.

하필 화장실 앞에 화단을 만들었냐고 핀잔할지 모르지만 '뒤'에 심는 것보다 그래도 '앞'이 낫다. 용담은 양지바른 곳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볼일 보러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달리보이지 않겠는가.

용담은 뿌리가 용의 쓸개만큼 쓰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8~10월에 꽃이 피는 대표적인 가을꽃이다. 종 모양의 꽃은 밤이 되면 닫히는데 이는 추위에 암술을 보호하려는 생존전략이다. 그리고 갑자기 비가 오거나 추워지면 야생벌도 꽃 속으로 들어가 비바람과 추위를 피할 수있다. 종 모양의 꽃이 벌들의 피난처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꽃을 관상하려는 우리에게는 얄미운 일이지만 자연계에는 크나큰 선행이기도 하다.

한여름의 햇볕이 옅어짐에 따라 푸른빛을 띠던 용담꽃은 보랏빛으로 바뀐다. 가을 이슬에 젖은 꽃송이는 바람에 파르르거리다 '애수'를 달래는 종소리를 들려준다. 단조의 부드러운 음률은 우리의 슬픔과 아픔을 달래주는 은은한 사랑의 찬가이기도 하다.

용담의 꽃말에는 ‘애수’도 있지만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라는 한 구절의 싯구와 같은말도 있다. 꽃봉오리가 많이 달리면 꽃 자체의 무게로 옆으로 처지고 비바람에도 쉽게 쓰러지지만, 쓰러진 잎과 잎 사이에서도 여전히 꽃을 피우기 때문에 이런 꽃말을 얻게 됐다.

덕수궁 화단의 용담꽃. 꽃말이 애수이지만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는 싯귀같은 꽃말도 있다. 이 좋은 계절 가을, 자연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내 마음속의 소리를 들어봄직 하다. (사진=이형로)

 

이제 계절은 바야흐로 천지가 울긋불긋 문자 그대로 천자만홍(千紫萬紅) 호시절이다. 그런데 이 세상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의 전쟁이 시작되어 이 좋은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고 있다. 피가 피를 부르는 살생, 게다가 국내 정치 상황은 또 어떤가.

요즘처럼 수상한 시절 문득 떠오르는 이가 있다. 청허휴정(淸虛休靜) 서산대사(1520~1604년)다. 오랫동안 묘향산 향로봉 보현사에서 주석하다가 원적암에서 세수 85세에 입적한 그는 일찌기 '향로봉에 올라(登香爐峯 등향로봉)'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萬國都城如蟻垤(만국도성여의질, 이 세상 도시는 개미굴과 같고)
千家豪傑若醯鷄(천가호걸약혜계, 천하호걸들도 한낱 술독의 초파리)
一窓明月淸虛枕(일창명월청허침, 창 가득한 맑은 달 베개삼아 누우니)
無限松風韻不齊(무한송풍운불제, 끝없는 솔바람엔 온갖 가락 다 들어있네)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보니 사람들이 모여사는 거대한 도시는 개미굴 같고, 세상의 영웅호걸이라는 사람들은 한갖 '술독 속의 초파리 같다(甕裏醯鷄 옹리혜계)'. 향로봉은 묘향산 봉우리 이름이기도 하지만 '천외천(天外天)'의 경지인 '대자연인(大自然人)'의 비유이기도 하다.

속세의 인간들은 먹고 살기 위해 아웅다웅 발버둥, 우글우글 늦은밤 지친 몸 이끌고 돌아오는 사람들은 마치 개미떼와 같다. 세상에서 제가 제일인양 떠드는 사람들, 그래봐야 항아리 속 하루살이 같거늘 뭐 그리 대단하다고 앵앵거릴까.

창문 한가득 비추는 달빛 맑고 그윽하다. 이를 베개삼아 대자연 속에서 솔바람 소리 듣는다. 그 소리 높낮이가 변화무쌍, 같은 소리 하나도 없다. 청허(淸虛)는 휴정의 법호이기도 하다. 휴정이 자신의 소리를 듣고 있다. 마음의 소리는 그윽할 수밖에 없다. 저 깊숙한 곳 '물외물(物外物)'의 소리를 듣고 있다.

홍콩작가의 작품 ‘從心所欲(종심소욕). 논어의 ’從心所欲不踰矩 종심소욕불유구)’에서 채자한 말로 ’마음이 하고자 하는대로 해도 어긋남이 없다‘는 뜻의 높은 정신세계를 일컫는다. (사진=인터넷 캡쳐) 

청허가 자연 속에서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면, 비슷한 시기의 문인이자 성리학자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는 속세에서 홀가분하고 태평스런 마음을 시조 '자연가(自然歌)'에 담았다.

산수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절로 수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여라

하서는 절로절로의 반복으로 자연스런 율동감을 주는 가운데 자연과 우리 인간과의 일체된 상태를 노래했다. 이를 한시에서는 '自然自然(자연자연)'이란 말로 번역했는데(2022년 6월27일, 70회 칼럼  백구과극 白駒過隙, 도법자연 道法自然 참조), 우리네의 감정에는 '절로' 와닿지만 중국인들의 정서에는 맞지 않는 조선화된 표현이다. 조선 중기에는 이미 우리식의 한문투가 고착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이리라.

절로절로라는 표현은 '될대로 되라'는 식의 소극적인 자세가 아니다.  오히려 도리스 데이가 부른 노래 제목이기도 한 '케 세라 세라'(Que sera, sera)라는 의미와 가깝다. 이 스페인어의 의미는 '될 것은 그대로 되는 것이니, 너무 조급해 하지 마라'는 의지가 담긴 말이다. 영어로는 'Whatever will be, will be'가 된다.

이는 포기하는 삶이 아닌 오히려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삶의 표현이다. 절로절로가 바로 그런 삶의 태도로 자연과 하나가 되는 삶의 방식이며, 내가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능동적인 삶의 표현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살고있는 이 지구도 술독보다 조금(?) 큰 항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내 주위의 환경이 좁고 넓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곳에서 어떻게 사는냐가 더 큰 문제일 것이다. 

하서는 갓 쉰살에 이 정도의 높은 정신세계를 노래했는데, 공자의 말대로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어긋남이 없다(從心所欲不踰矩 종심소욕불유구)'는 종심(從心, 70살)의 나이에 가까운 필자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던가. 이 가을에 또다시 나를 되돌아본다.

용담의 꽃말인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를 제목으로 졸시 한 수를 붙인다.

"세상을 가만히 살펴보면 꽃이 필요없는 사람에게는 꽃이 넘친다
하지만 정작 꽃이 간절한 사람에겐 줄 꽃이 없다 
차라리 가슴앓이하는 그대에게 눈을 돌려 
슬픔에 눈높이를 맞추고 한송이 꽃을 피우고 싶다
당신이 슬퍼할 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이형로는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대만대학 철학연구소와 교토대학 중국철학연구소에서 수학 후 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다. 현재 덕수궁에서 근무하며 스스로를 '덕수궁 궁지기'라고 부른다.저서로는 ‘궁지기가 들려주는 덕수궁 스토리’, ‘똥고집 궁지기가 들려주는 이야기’(2018년)에 이어 2019년말 '궁지기가 들려주는 꽃*나무의 별난 이야기'를 펴내기 시작해서 현재 9권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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