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로의 고사성어로 보는 세상](102) 전분세락(轉糞世樂) 예미도중(曳尾塗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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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로의 고사성어로 보는 세상](102) 전분세락(轉糞世樂) 예미도중(曳尾塗中)
  • 이형로
  • 승인 2023.12.04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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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
- 부유하지만 속박받는 것보다 가난해도 유유자적한 삶이 좋아
‘전분세락’(轉糞世樂)은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좋다는 뜻이다. 장자 추수편(秋水篇)의 일화에서 유래한 사자성어 ‘曳尾塗中’(예미도중)은 꼬리를 진흙속에 묻고 끈다는 말로 부귀해도 속박받는 삶보다 가난해도 유유자적하며 사는 것이 낫다는 뜻이다. (사진=인터넷 캡쳐)

군시절 106mm 무반동총 사수였던 필자는 훈련을 나갔다 지프차가 살얼음에 미끄러져 도로에서 5~6m 밑으로 떨어지는 사고를 겪었다. 다른 분대원이 구해줄 때까지 정신을 잃었는데 천행으로 손과 팔의 찰과상 이외에는 다친 곳이 없었다. 떨어진 곳이 맨땅이 아니라 거름더미 위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지프차가 떨어지는 1~2초도 안될 그 짧은 순간 머리속에선 영화 장면처럼 어릴 때부터 당시까지의 온갖 장면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책에서나 보았던 신기한 현상을 경험한 것이다. 그중에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장면은 대학 입학후 철학개론 첫수업이었다. 노교수는 철학이란 어떤 학문인가에 대해 열변을 토하더니 마지막엔 개똥도 쓸 데가 있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철학이란 공부가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이 아니란 점을 강조하려고 개똥까지 끌어온 것을 이해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첫시간에 개똥 비유는 좀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다.

아무튼 거름더미에 떨어져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이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전분세락 轉糞世樂)는 속담을 신봉하게 됐다. 어느덧 50년이 다 돼가는 일이다.

‘예미도중(曳尾塗中)'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장자 추수편(秋水篇)에 실려있는 일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꼬리를 진흙 속에 끌고다닌다'는 뜻이다.

하루는 장자가 강가에서 낚시를 하고있는데, 초왕이 장자를 재상으로 초빙하려 대부 두사람을 보냈다. 대부들은 임금께서 선생을 초나라 재상으로 모셔 정치를 맡기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정중하게 전했다. 이에 장자는 낚싯줄을 드리운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내가 들으니 초나라에는 점치는 거북(神龜)의 껍질이 있는데 죽은지 삼천년이 되었다 하더군요. 당신네 임금은 그것을 비단 상자에 넣어 묘당에 받들어 모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 거북은 죽어서 껍질로 귀한 대접을 받기 원했을까요, 아니면 살아서 오히려 진흙 속일망정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바랐을까요?" 

장자는 대부들의 "그야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원했을테죠"라는 답에 "그대들은 돌아가시요. 나도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고 다닐 것이요"라며 제의를 단칼에 거절했다.

‘吾聞楚有神龜 死已三千歲矣 王以巾笥而藏之廟堂之上 此龜者 寧其死爲骨而貴乎 寧其生而曳尾於塗中乎 二大夫曰 寧生而曳尾塗中 莊子曰 往矣 吾將曳尾於塗中 오문초유신귀 사이삼천세의 왕이건사이장지묘당지상 차귀자 영기사위골이귀호 영기생이예미어도중호 이대부왈 영생이예미도중 장자왈 왕의 오장예미어도중)’

장자는 부귀로 인해 속박을 받는 것보다 차라리 지금의 여유를 즐기며 유유자적 살고 싶다고 한 것이다.

섬진(蟾津) 박용철의 작품 ‘樂而忘憂’(낙이망우). 삶을 즐기며 근심을 잊는다는 뜻이다. (사진=인터넷 캡쳐) 

천자문 93조는 '求古尋論 散慮逍遙‘(구고심론 산려소요)'이다. 구고(求古)는 지난 일을 되돌아 탐구한다는 뜻이고, 심론(尋論)은 옛 현인들이 말한 도(道)를 되새김한다는 말이다. 구고심론은 '과거에 현인이란 사람들의 말을 되새겨 현재에 적용시킨다'는 뜻이기도 하다. 추사 김정희가 강조한 ‘法古創新’(법고창신,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만들다)이란 말과도 통한다.

산려(散慮)는 '속된 생각을 흩어버리다' 또는 '답답한 마음을 날려버리다'는 뜻이다. 소요(逍遙)는 '한가롭게 유유자적한다'는 말로 장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 절대 자유로운 경지에서 노니는 소요유(逍遙遊)를 말했다. 그러니 '산려소요'란 '속된 생각을 떨쳐버리고 유유자적한다'는 뜻이 된다.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Holocaust, 1933~1945) 생존자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 알려진 알리제 헤르츠 좀머는 2014년 2월에 11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1903년 체코 프라하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작가 카프카와 작곡가 말러가 자주 방문하는 등 당시 문화계 유명인사들과 친분이 두터운 집안이어서 그녀는 이런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피아니스트로 자랐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은 나치에 의해 강제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180도로 바뀌었다. 남편, 아들과 함께 1943년 테레진 수용소에 수감됐다. 그때 함께 수용된 많은 사람들은 아우슈비츠나 다른 수용소로 보내진 뒤 대부분 유명을 달리했다. 남편 역시 다른 수용소로 보내졌다가 발진티프스로 사망했고, 어머니도 연락이 끊겼다.

하루하루가 지옥같았던 수용소의 삶을 지탱해준 것은 바로 쇼팽의 음악이었다. 가족과 헤어진 뒤 그녀는 쇼팽 에튀드 24곡을 하루 8시간씩 연습하는 것으로 삶의 끈을 이을 수 있었다. 1945년 소련군에 의해 수용소가 해방되어 1986년까지 예루살렘의 한 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다 말년에 런던으로 이주했다. 

이런 그녀의 삶은 두 권의 책으로 쓰여졌다. 그중에 '백년의 지혜'란 책에서 그동안 주어진 하루를 기꺼이 기뻐하며 살았다며 '나치에게 사랑하는 이를 잃었지만 그래도 인생은 아름다운 선물이었다'라는 말로 생을 마무리했다.

얼마전 필자 고향의 선산 옆에 외지 사람이 땅을 사들여 오석(烏石)으로 커다란 비석, 화강암으론 상석이며 석물로 그야말로 ‘삐까번쩍’하게 묘지를 장식한 집안이 있다. 장자의 말대로 살아서 진흙뻘에 뒹굴지언정 죽은 후에 호강(?)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알리제처럼 비록 고통을 겪을지라도 주어진 하루하루를 선물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섣부른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필자 연배쯤 되면 이제 지난 일을 정리할 때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삶, 비록 개똥밭일망정 이승은 충분히 살 가치가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散慮逍遙 樂而忘憂’(산려소요 낙이망우, 유유자적하며 삶을 즐기며 걱정을 잊는다)의 생활도 괜찮을 것이다.  

이형로는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대만대학 철학연구소와 교토대학 중국철학연구소에서 수학 후 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다. 현재 덕수궁에서 근무하며 스스로를 '덕수궁 궁지기'라고 부른다.저서로는 ‘궁지기가 들려주는 덕수궁 스토리’, ‘똥고집 궁지기가 들려주는 이야기’(2018년)에 이어 2019년말 '궁지기가 들려주는 꽃*나무의 별난 이야기'를 펴내기 시작해서 현재 9권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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