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로의 고사성어로 보는 세상](57) 정동길의 계절언어(季節言語)
상태바
[이형로의 고사성어로 보는 세상](57) 정동길의 계절언어(季節言語)
  • 이형로
  • 승인 2021.12.06 14:17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단풍의 가을정취 사라지고 스산한 바람…‘을씨년스러워’
- 코로나19 창궐, 대선 정쟁으로 더 어수선한 분위기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가을정취가 가득했던 정동길이 지금은 삭막한 바람이 부는 스산한 모습으로 변했다. 현재 정동길의 계절언어는 ‘을씨년스럽다’이다. (사진=이형로)

정동길은 불과 일이주일 전만해도 울긋불긋 단풍이 아름다운 길이었다. 특히 노란 은행잎은 도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가을의 정취를 물씬 느끼게 해줬는데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며칠 내리니 그나마 남아있던 단풍잎은 거의 떨어지고 봄을 기다리는 나목(裸木)이 됐다. 

겨울철 정동길 바람은 매섭기로 유명하다. 아직 한겨울은 아니지만 낙엽을 쓸고가는 스산한 바람에 정동길은 '을씨년스럽다'. 그나마 산책하는 연인들과 무명의 버스킹 가수, 화가의 온기가 황량함을 덜어주고 있다.

어느 나라의 어떤 언어든 계절을 표현하는 계절언어, 즉 계절어(季節語)가 있다. 가을에 많이 쓰는 한자성어로는 하늘이 맑고 말이 살찌는 계절이라는 천고마비(天高馬肥), 단풍이 울긋불긋하다는 감홍난자(酣紅爛紫)나 만산홍엽(滿山紅葉), 등불을 가까이하고 책을 읽기 좋은 계절이라는 등화가친(燈火可親) 등이 있다.

또한 낙엽이 떨어지는 것만으로 가을인 줄 안다는 일엽지추(一葉知秋), 가을바람에 낙엽이 진다는 추풍낙엽, 가을바람이 황량하고 쓸쓸하게 분다는 추풍삭막(秋風索莫) 등의 표현도 있다.

겨울을 표현하는 말로는,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차가운 눈을 표현하는 북풍한설(北風寒雪), 나뭇잎이 다 떨어진 겨울의 춥고 쓸쓸한 풍경이라는 낙목한천(落木寒天), 눈 내리는 깊은 겨울의 심한 추위를 묘사한 엄동설한(嚴冬雪寒) 등이 있다.

일본에는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인 하이쿠(俳句)가 있다. 하이쿠는 일본 전통의 리듬인 7•5조를 바탕으로 한 5•7•5의 3구 17음인 단형시다. 본래 렌가(連歌)의 홋쿠(発句)가 독립한 것이다. 하이쿠에는 엄격한 음수율과 더불어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내용이 있다. 계절을 상징하는 시어인 계어(季語, Kigo)와 기레지(切字)라고 불리는 구를 끊어주는 글자가 포함돼야 한다.

하이쿠에서 가을을 나타내는 계어로는 새털구름인 이와시구모(鰯雲), 억새인 오바나(尾花)와 억새밭인 하나노(花野)가 있다. 그리고 단풍인 코요(紅葉, 黃葉)와 낙엽의 의미인 코라쿠(黃落) 등이 있다. 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에 내리는 비인 시구래(時雨)가 있으며 겨울에 눈(雪)을 빼놓을 수 없다.

글머리에서 요즘 정동길의 분위기를 '을씨년스럽다'고 했다. 이는 순우리말로 늦가을이나 겨울에 사용하는 일종의 계절어라 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 말이 1905년 한일간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 때문에 생겨나 그 이후 사용됐다고 하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오미크론 변이 등 코로나19 창궐에 대선 시국까지 겹쳐 그렇지않아도 스산한 겨울이 더욱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사진=인터넷 캡처)

정동극장 옆 골목길을 들어서면 중명전(重明殿)이라는 건물을 만날 수 있다. 중명전의 원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으로 1899년 6월에 지어진 대한제국의 황실도서관이다. 지은지 2년만인 1901년 11월16일 수옥헌은 화재로 소실된다. 이때 1층 건물이었던 건물은 1902년 5월 지하 1층 지상 2층 벽돌건물로 새롭게 지어진다. 이후 1904년 경운궁 대화재로 고종이 수옥헌에서 잠시 머물고, 이때 수옥헌은 중명전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이곳에서 을사년인 1905년 11월17일 을사오적(乙巳五賊)인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이 고종이 부재한 자리에서 일제와 을사늑약을 체결한다. 모두가 아는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기고 내정간섭까지 가능하도록 만든 말그대로 늑약(억지로 맺은 조약)이었다. 

이때 온 나라가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늑약이 체결된 날 나라의 분위기는 당시 정동길처럼 몹시 스산하고 삭막했다. 

이해조의 신소설 '빈상셜'(1908)에서 '을사년시럽다'라는 표현이 있어 '을씨년스럽다'가 1905년 이후 사용된 표현이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 소설이 씌어진 1908년은 을사늑약이 맺어진 시점에서 불과 3년 뒤이기 때문에 제법 그럴싸한 추론이다.

조선후기 재야학자인 송남(松南) 조재삼(趙在三, 1808~1866)은 두 아들의 교육용으로 백과사전격인 송남잡지(松南雜識)를 편찬했다. 그는 이 책 방언류(方言類)에서 "세상에서 을사년은 흉하고 두려워하는 까닭에 지금 생전 낙이 없는 것을 '을씨년스럽다'고 한다"라 설명했다. 송남잡지는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이미 1905년 이전부터 사용됐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때는 '날씨나 분위기가 스산하고 쓸쓸하다'는 의미보다는 '살림살이가 궁핍하다'라는 의미가 강했다. "을씨년스럽던 살림살이가 나아졌다"라는 표현이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아울러 북한에서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싫거나 매우 지긋지긋한 데가 있다'는 의미로 쓰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비롯해 을사년에 크고 작은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런 일련의 사건과 뱀과의 관계에서 을사년은 더욱 기분나쁜 의미가 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천간의 두번째인 을(乙)은 오행으로 푸른색을 뜻하니 '을사'는 '푸른 뱀'이 된다. 뱀 자체도 기분나쁜 동물인데 거기에 더해 푸른 뱀은 더욱 징그럽고 섬뜩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을사년스럽다'가 1920년과 1938년판 '조선어사전'에는 모두 '을시년스럽다'로 제2음절이 모음변화되어 표기돼 있다. 1958년의 '큰사전'에 와서야 지금과 같은 '을씨년스럽다'라는 어형이 나온다.

소설은 벌써 지나고 곧 눈이 많이 내린다는 대설이다. 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의 출현과 내년 대선정쟁으로 세상은 뒤숭숭하다. 게다가 날씨마저 을씨년스러운 겨울로 접어들었다. 이럴 때는 호주머니에 핫팩 하나 넣고 다니며 따뜻하게 지내는 것도 괜찮으리라.

이형로는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대만대학 철학연구소와 교토대학 중국철학연구소에서 수학 후 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다. 현재 덕수궁에서 근무하며 스스로를 '덕수궁 궁지기'라고 부른다.
저서로는 ‘궁지기가 들려주는 덕수궁 스토리’, ‘똥고집 궁지기가 들려주는 이야기’(2018년)에 이어 2019년말 '궁지기가 들려주는 꽃*나무의 별난 이야기' 1권을 펴내기 시작해서 현재 8권을 펴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노인호 2021-12-06 19:29:26
가을과 관련된 다양한 어휘를 알 수 있었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서울시 송파구 올림픽로35길 93, 102동 437호(신천동,더샵스타리버)
  • 대표전화 : 02-3775-4017
  • 팩스 : -
  • 베트남 총국 : 701, F7, tòa nhà Beautiful Saigon số 2 Nguyễn Khắc Viện, Phường Tân Phú, quận 7, TP.Hồ Chí Minh.
  • 베트남총국 전화 : +84 28 6270 1761
  • 법인명 : (주)인사이드비나
  • 제호 : 인사이드비나
  • 등록번호 : 서울 아 05016
  • 등록일 : 2018-03-14
  • 발행일 : 2018-03-14
  • 발행인 : 이현우
  • 편집인 : 장연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용진
  • 인사이드비나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인사이드비나. All rights reserved. mail to insidevina@insidevina.com
인터넷신문위원회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