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용의 재계춘추(財界春秋)(40) ‘한국라면 원조' 삼양라면, 사람에 대한 애정에서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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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용의 재계춘추(財界春秋)(40) ‘한국라면 원조' 삼양라면, 사람에 대한 애정에서 탄생
  • 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전 SK그룹 사장)
  • 승인 2022.11.08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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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양식품 전중윤 창업주…먹을 것 없던 1960년대 서글픈 장면에 충격
- 미군이 버린 음식 끓여만든 ‘꿀꿀이죽’ 사먹으려 줄선 노동자들
- 일본서 기술 배워와 출시…오늘날 '국민먹거리'로 자리매김
‘한국라면의 원조’ 삼양식품 창업주 고(故) 전중윤 명예회장과 초기 삼양라면 제품. 전 명예회장은 먹을것이 부족했던 1960년대 미군이 버린 음식을 끓여만든 ‘꿀꿀이죽’을 사먹기위해 장사진을 친 노동자들의 서글픈 모습에 충격을 받고, 라면 생산에 나섰다. 사람에 대한 애정에서 탄생한 라면은 ‘국민먹거리’로 자리매김한지 오래됐다. (사진=삼양식품)

한국식 라면의 탄생은 삶의 애환이 닮긴 ‘한 장면’에서 출발했다. 삼양식품 창업자인 전중윤 명예회장은 1960년대초 남대문시장에서 ‘꿀꿀이죽’을 사먹기위해 장사진을 친 노동자들을 목격했다. 먹을 것이 없어 미군이 버린 음식을 끓여 한끼를 때우는 비참한 모습을 보고 식량난 해결과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 묘안이 바로 ‘라면’이었다. 

전중윤 명예회장은 50년대말 보험회사를 운영할 당시 일본에서 경영연수를 받았다. 그때 맛보았던 라면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직 식량자급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국내 실정에서 라면은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 길로 일본을 찾아갔지만 기술을 지도받기란 쉽지않았다. 처음 접촉한 라면회사는 까다로운 조건과 많은 금액을 먼저 요구했고 한국으로의 라면 수출 가능성을 생각해 제조장치 판매에 소극적이었다. 

전 명예회장은 고생 끝에 지인의 도움으로 겨우 일본 묘조(明星)식품의 오쿠이 기스요미((奥井清澄)사장과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전 명예회장의 뜻을 전해들은 오쿠이 사장은 흔쾌히 이를 수락했다. 기술지원을 무료로 해주고 로열티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오히려 패전후 극도로 악화된 일본경제를 일으키는 데 한국특수가 큰 역할을 했다며 미래를 위해 함께 시작하자고 응원했다. 

전중윤 명예회장은 오쿠이 사장의 도움을 받아 공장설비•제조공정•품질규격 등 생산과 관련된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이후 오쿠이 사장은 전 명예회장의 열정과 양심적인 경영인의 모습에 감탄해 회사 비밀이었던 라면 수프 배합비율도 전달했다고 한다. 

1963년 ‘꿀꿀이죽’보다 5원 비싼 10원에 처음 출시된 삼양라면은 오늘날  ‘국민먹거리’로 자리매김은 물론 세계 85개국에 수출되며 글로벌 K-푸드 문화 확산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사진=삼양식품)

당시 일본 라면 중량은 85그램이었다. 하지만 배고픔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기 위해 삼양식품은 라면 한 봉지를 100그램으로 만들었다. 가격도 소위 ‘꿀꿀이죽’이 5원이었던 점을 감안해 10원으로 책정했다. 당시 우리나라 물가를 보면 커피 35원, 영화 55원, 담배 25원 수준이었다. 

오쿠이 사장이 한번은 ‘라면 값이 너무 저렴한 것 아니냐’고 물었다. 질문을 가만히 듣던 전 명예회장은 “이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이 아니다. 식량난으로 어려운 한국 상황에서 누구나 배부르게 먹으려면 그 정도의 양과 가격을 책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답했다. 

때마침 정부는 1965년 식량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혼식•분식 장려정책을 실시했고, 라면은 저렴하고 간편하지만 영양면에서도 부족함이 없는 한끼 식사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1963년 출시 당시만해도 삼양라면은 ‘닭고기’ 육수를 베이스로 만들었다. 묘조식품의 수프 배합비율을 토대로 만들어진 초기 라면 맛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일본은 후추와 산초 등을 선호했고 한국은 마늘과 고춧가루를 요리에 많이 썼기 때문이다. 

전 명예회장은 느끼하고 짠 초기 맛에 얽매이지 않고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라면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1966년 삼양식품은 한국식 수프 개발에 돌입했고, 3년후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라면 생산 시작후 4년째 되는 해부터 판매량은 계속해서 증가했고, 1966년 11월 240만 봉지의 라면을 팔아치웠다. 또 1970년대 접어들어 삼양식품의 매출액은 초창기대비 무려 300배 나 성장하는 기염을 토했다. 

남북한 체제를 비교하는데도 라면은 종종 인용된다. 고 이웅평 대령이 1983년 북한에서 비행기를 몰고 귀순하게 된 계기가 해안에 떠 밀려온 라면봉지 때문이었다는 일화도 있다. 개성공단이 운영될 때도 남한의 라면이 넘어갈 때는 ‘꼬부랑 국수’라는 이름으로 재포장해서 나갔다고 한다. 

이 모든 라면의 원조가 삼양라면이다. 사람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 라면은 어느새 온 국민의 먹거리로 자리매김은 물론이고, 오늘날 세계 85개국에 수출되며 글로벌 K-푸드 문화 확산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권오용은
고려대를 졸업했으며 전국경제인연합회 국제경제실장•기획홍보본부장, 금호그룹 상무, KTB네트워크 전무를 거쳐 SK그룹 사장(브랜드관리부문), 효성그룹 상임고문을 지낸 실물경제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다. 현재 공익법인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로 기부문화 확산과 더불어 사는 사회 분위기 조성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대한혁신민국(2015), 권오용의 행복한 경영이야기(2012),가나다라ABC(2012년), 한국병(2001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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