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로의 고사성어로 보는 세상](92) 망우지초(忘憂之草), 여름꽃 원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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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로의 고사성어로 보는 세상](92) 망우지초(忘憂之草), 여름꽃 원추리
  • 이형로
  • 승인 2023.07.03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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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떠올리게하는 꽃…근심•걱정, 허전함•쓸쓸함 덜어줘
덕수궁에 핀 원추리. 여름철의 대표꽃 원추리는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꽃으로 고금의 시화(詩畵)의 주요소재중 하나이며 근심이나 걱정을 잊게하고 허전함과 쓸쓸함을 덜어준다는 의미로 망우초(忘憂草) 또는 요수초(療愁草)라고도 한다. (사진=이형로)    

이선희의 '라일락이 질 때'를 들으며 봄을 보낼 때가 엊그제였는데 벌써 능소화, 비비추, 원추리가 한창인 여름이 되었다. 산길이나 시골집 뒷뜰에서나 볼 수있었던 여름의 대표적 꽃인 원추리를 요즘은 동네정원이나 시내화단에서도 흔하게 볼 수있어 좋다.

어릴때 필자의 서울 변두리 한옥집 장독대 옆에는 아담한 꽃밭이 있었고 채송화, 나팔꽃, 맨드라미 등이 계절을 달리하며 피었다. 그중에 장맛비를 맞으면서도 노랗게 피던 원추리꽃이 눈에 선하다. 집안일로 바쁜 일상 속에서도 노란 원추리꽃과 하얀 뭉게구름을 번갈아 쳐다보던 ‘엄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원추리는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가 원산지다. 옛부터 세계 각지에 전해져 지금은 관상용으로 많은 품종을 키우고 있다. 원추리는 6월부터 잎사이에서 길게 나온 꽃대 끝에 대여섯 송이가 달린다. 한송이가 벙글어 하루 지나면 시들고 이튿날에는 다른 송이가 핀다. 그래서 '하루살이꽃'이란 뜻의 '일일화(一日花)'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서양에서도 'Day Lily'라 부르고 있다.

중종때 역관 최세진(崔世珍, ?~1542)이 지은 한자학습서인 훈몽자회는 원추리 훤(萱)을 '넘나믈'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파리가 넓적하다는 '넙나물'에서 음운변화하지 않았나 추정한다.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의 산림경제에서는 '원츄리'라 했는데, 훤초(萱草)에서 '원초'가 되어 모음변화에 의해 '원추', 여기에 접미사 '리'가 붙어 '원추리'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원추리꽃은 노란색이다. 노란색은 오행에서 중앙을 상징하는 색으로 사방에서 침입하는 잡귀와 온갖 독기를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심지어 사슴이 뜯어먹으면 모든 독(九毒)이 해독된다고 해 녹총(鹿葱)이라고도 한다. 원추리는 집안의 중심이며 깊숙한 내당 뜰에 심는 꽃이다. 아녀자들의 근심이나 걱정을 잊게 하고 허전함과 쓸쓸함을 덜어준다는 의미로 망우초(忘憂草) 또는 요수초(療愁草)라고도 한다.

원추리는 의남초(宜男草)라고도 불렀다. 이는 임산부가 원추리 꽃봉오리를 왼쪽 머리에 꽂고 다니거나 저고리깃에 꽂고 다니면 아들을 낳는다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심지어 뱃속에 든 태아가 여아일지라도 원추리의 주력(呪力)으로 사내아이가 된다는 과장섞인 속신(俗信)도 있다. 원추리 꽃봉오리가 사내아이의 '고추'를 닮았다는데서 기인한 일종의 '유감주술(類感呪術 Homoeopathic Magic)'이다. 심지어 원추리꽃이나 새싹을 삶아 먹고 합방하면 아들을 가진다는 은밀한 풍습도 있었다.

원추리는 의남초(宜男草)라고도 불렀다. 임산부가 원추리 꽃봉오리를 왼쪽 머리에 꽂고 다니거나 저고리깃에 꽂고 다니면 아들을 낳는다 해서 붙여진 별명으로 원추리 꽃봉오리가 사내아이의 '고추'를 닮았다는데서 기인한 일종의 '유감주술(類感呪術 Homoeopathic Magic)'이다. (사진=인터넷 캡쳐)

일찍이 시경에는 전쟁으로 원정간 애인(남편)을 그리며 부른 원추리 노래가 있다. 시경 국풍•위풍(國風•衛風)의 '백혜(伯兮; 씩씩한 그대)'가 그것으로 ‘焉得諠草 言樹之背 願言思伯 使我心痗, 언득훤초 언수지배 원언사백 사아심매)"라 노래했다. ’어디에 원추리가 없을까/ (있으면) 안채뜰에 심어 볼텐데/ 당신 생각이 떠나질 않아/ 안타까워 가슴이 아픕니다‘ 

여기서 훤초(諠草)의 훤(諠)은 '잊는다'라는 의미로 원추리인 훤초(萱草)를, 배(背)는 아녀자가 머무는 안채인 북당(北堂)을 뜻한다. 예전에는 연인과 헤어질때 작약을, 먼 곳으로 떠나는 사람이 빨리 돌아오라고 당귀를, 그리고 근심을 잊으라 원추리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때쯤이면 생각나는 그림 두점이 있다. 하나는 명말청초의 화훼화가 운수평(惲壽平, 1633 ~1690)이 그린 원추리 그림이다. 그는 산수화의 대가 왕시민의 문하에 들어가 처음에는 산수화를 배웠다. 중년이후 화훼 전문으로 바꿔 상주초충화의 전통을 밟은 몰골화법(沒骨畫法)을 완성시켜 이후 중국 화단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화제(畵題)에서 원추리를 ‘何事閑庭常燔此 愛他名草是忘憂(하사한정상번차 애타명초시망우)‘라고 표현했다. ’어떤 일인지 조용한 뜰에서 늘 불타오르는 이 녀석은 나보다 남을 사랑한다는 이름의 풀로 망우초라 한다네‘라는 뜻이다.

여름 한낮 정원에서 태양만큼이나 벌겋게 불타는 듯한 원추리꽃은 나보다 남들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우리에게 세상 시름 잊고 살라하고 있다.

또 다른 그림은 양주팔괴(揚州八怪)의 한 사람인 김농(金農,1687~1764)의 원추리다. 그는 기행과 괴벽으로 유명했음에도 쉰살이 넘은 늦은 나이에 그림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뜻을 둔 덕분에 그의 그림은 예서와 해서를 펼쳐놓은 듯 깔끔하고 거침이 없다. 권세와 부귀에 타협하지 않은 성격으로 강직하면서도 서권기(書卷氣) 넘치는 그림을 그렸다. 그의 원추리 작품은 그림도 그림이지만 화제 때문에 그림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안채에 피었으니
한평생 긴 세월이 즐겁고 기쁘다네
좀체로 사람들에게 근심을 보이지 않으니
과연 원추리는 모든걸 잊게 해주는 망우초로구나
-곡강외사가 작은 재주로 붙이다-

花開笑口北堂之上 (화개소구북당지상)
百歲春秋一生歡喜 (백세춘추일생환희)
從不向人愁 (종불향인수)
果然萱草可忘憂 (과연훤초가망우)
-曲江外史小筆幷題 (곡강외사소필병제)-

원추리꽃이 활짝 핀 모습을 '환하게 웃는다'는 뜻의 소구(笑口)로 표현했다. 북당(北堂)은 본채의 북쪽에 지은 별채로 보통 아녀자들의 거처를 이른다. 이 시에선 어머니의 은유로 쓰였다. 곡강외사(曲江外事)는 김농의 여러 호 가운데 하나다.

김농은 별채에 거처하는 어머니를 원추리꽃에 비유하여 그림에 곁들였다. 그는 한여름 햇살을 받고 활짝 핀 원추리꽃에서 어머니를 보았다. 한평생 남들에게 특히 자식들에게 근심스런 모습을 좀체로 드러내지 않는 어머니다. 당신이라고 왜 근심과 걱정이 없었겠느냐마는 원추리꽃을 닮은 어머니의 얼굴만 봐도 우리는 모든 걸 잊고 평안해질 수가 있었다. 원추리는 어머니의 근심과 함께 우리들의 걱정까지 잊게 해주는 망우초다.

이형로는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대만대학 철학연구소와 교토대학 중국철학연구소에서 수학 후 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다. 현재 덕수궁에서 근무하며 스스로를 '덕수궁 궁지기'라고 부른다.
저서로는 ‘궁지기가 들려주는 덕수궁 스토리’, ‘똥고집 궁지기가 들려주는 이야기’(2018년)에 이어 2019년말 '궁지기가 들려주는 꽃*나무의 별난 이야기'를 펴내기 시작해서 현재 9권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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